가야금병창, 국악교육의 스승 박귀희
나의 가야금 스승이신 권인영 선생님께서 젊어서(그때도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서울에 가서 가야금병창을 배울 때 부끄러워 제대로 소리를 못내었는데 선생님께서 혼자 집으로 불러 가르쳐 주셨다고 했다. 그 분이 돌아가시며 여관으로 사용한 멋진 집을 국악학교에 기부한 대단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전후 이야기를 종합하니 그 분이 박귀희 선생님이다. 나의 스승의 스승님이 박귀희 선생이면 나의 음악적 계보는 찬란한 왕족이다.^^
박귀희는 본명 오계화로 1921년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1935년, 불과 열네 살의 나이에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입단하면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박지홍, 유성준, 조학진 등 당대의 명창들에게서 판소리와 단가를 사사받으며 소리의 기본기를 다졌다. 1937년에는 강태홍과 오태석으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배우며 국악 전반에 걸쳐 폭넓은 수련을 쌓았고, 1939년 동일창극단에서 《일목장군》으로 무대에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 국악인의 사회적 입지가 매우 제한적이었으나, 박귀희는 남성 중심의 국악계에서도 뛰어난 기량과 독자적인 해석으로 주목을 받으며 점차 입지를 다져 나갔다.
광복 이후 박귀희는 김소희와 함께 여성국극 동호회를 창설하고 창극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선화공주》(1946), 《반달》(1954) 등의 창극에 주역으로 출연하며 판소리와 무대예술을 결합한 창극의 정립과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는 미국 시카고 박람회를 비롯하여 일본,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해외 공연을 진행하며 한국 전통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 사절단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녀의 공연은 단순한 소리의 전달을 넘어 민속예술의 깊이와 미학을 함축하고 있었고, 이는 국외 관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활동은 국악이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동시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예술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박귀희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업적은 가야금 병창의 정립과 대중화에 있다. 그녀는 기존의 정형화된 병창 형식을 벗어나 판소리 대목들을 병창곡으로 재해석하고 편곡하는 시도를 통해 병창의 레퍼토리를 획기적으로 확장하였다. 《적벽가》, 《심청가》, 《춘향가》 등의 주요 대목을 병창 형식으로 재구성하였으며, 민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병창 스타일을 창출하였다. 특히 수십 명의 제자들과 함께 대규모 무대를 구성하여 병창의 시청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연출은 당대 국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로써 박귀희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이 예술 장르를 정립한 장본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국악 교육자로서의 박귀희는 예술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1955년 한국예술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맡았으며, 1960년에는 국악예술학교(현 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국악 교육의 제도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당시까지 전통음악은 주로 도제식 교육에 의존하던 상황이었으나, 박귀희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국악 교육의 지평을 넓히고자 했다. 그녀는 후진 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고,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증하며 교육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헌신은 ‘국악교육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낳게 했고, 안숙선, 강정숙, 김성녀 등 후대 국악계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길러내는 토대가 되었다. 그녀의 교육 철학은 ‘전통은 이어져야 하며, 변화 속에서도 본질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박귀희는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89년에는 모란장을 수훈하면서 문화예술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그녀의 삶은 예술가로서의 성취에 그치지 않고, 교육자이자 창작자로서 전통음악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박귀희 가야금 병창곡집》(1979)에는 그녀가 직접 편곡한 50여 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가야금 병창의 교본으로 지금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판소리, 민요, 창극, 무용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무대 연출과 예술적 통합성은 그녀가 단순한 연주자가 아닌 종합예술의 연출가였음을 방증한다. 박귀희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국악의 중심에서 창조적 해석과 실천을 통해 국악을 살아 있는 예술로 만든 인물이었다. 그녀는 오늘날까지도 ‘국악의 대모’로 불리며, 한국 전통음악의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인물로 기억된다.


* 사진 출처: 허응백 <인문학으로 읽는 국악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