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명인

가야금 거장 정남희

가야금 연주자 2025. 4. 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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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희는 1905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가야금에 재능을 보였으며, 8세 때 한덕만에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세에는 협률사에 들어가 연주 활동을 시작하였고, 1924년에는 안기옥에게서 김창조 가야금산조를 전수받았다. 이후 전남 여수의 음악양성소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가야금병창과 산조, 민요, 판소리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기 콜롬비아, 빅타, 폴리돌, 오케 등 여러 음반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며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창극 활동을 활발히 하며 <흥보전>, <춘향전>, <숙영낭자전>, <심청전> 등 주요 작품에 출연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국악원에서 박동실, 조상선 등과 함께 국악의 재건에 힘썼으며, 가야금산조의 완성도를 높였다. 6·25전쟁 중 월북하여 평양의 국립예술극장 협률단에서 활동하며 창극 <리순신장군>, <춘향전> 등의 작품 창작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1951년부터 중국,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국제적으로도 가야금의 위상을 알렸다.

정남희는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 분야에서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김창조 계열의 산조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산조를 창작하였으며, 진양조의 형식과 장단 연속체, 담백한 조성 변화, 유연한 기교로 풍요로운 음악적 세계를 펼쳤다. 그의 산조는 남한에서는 김윤덕에게 계승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북한에서는 구조를 대폭 수정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산조 음반은 유성기 음반 중 명반으로 평가된다.

교육자로서도 정남희의 업적은 크다.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학부 학부장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안기옥과 함께 『가야금교측본』을 집필하였다.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민요연구실 연구사로서 민요 수집 및 정리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제자 김길환이 채보·정리한 『가야금산조 1』(1992)이 출판되는 등, 북한 가야금 연주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남희는 1952년 북한 최초의 공훈배우, 1959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연로보장을 받으며 음악가동맹의 민요연구실에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1984년 사망할 때까지 가야금 연주자, 작곡가, 창극 배우, 교육자, 연구가 등 다방면에서 한국 전통음악의 발전과 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예술적 유산은 남북한을 아우르며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가야금 거장 정남희

* 참조: 네이버 한겨레음악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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