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명인 황병기
황병기(黃秉冀, 1936–2018)는 한국 가야금 음악의 현대적 지평을 연 인물로, 연주자이자 작곡가, 교육자로서 국악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란지에서 가야금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윤, 김윤덕, 심상건 등 당대의 명인들에게 정악과 산조를 사사하며 본격적인 국악인의 길을 걷는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58년에는 KBS 국악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연주뿐만 아니라 작곡, 연구, 교육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국악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무대에서도 주목받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황병기의 대표적인 초기 창작곡 ‘숲’(1962)은 국악사에서 의미 있는 전환점을 이룬 작품이다. 이 곡은 가야금을 중심으로 자연의 생명력과 서정을 표현하며, 정형화된 전통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악 언어를 탐색한 시도로 평가받는다. 당시 국악계에서는 창작곡이 드물었기에, ‘숲’은 가야금 창작곡의 효시로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황병기는 이 곡을 통해 “전통을 모르면 창작도 없다”는 신념 아래 고전적인 어법을 바탕으로 현대적 감수성을 입혔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숲’은 국악 창작의 모범이 되는 작품으로 회자된다. 이 곡은 조용하지만 깊은 숲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청자에게 명상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1974년에 발표된 ‘침향무(沈香舞)’는 황병기의 음악 세계가 가장 정제되고 고유한 형태로 표현된 걸작이다. 이 곡은 침향나무 향이 퍼지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신라시대의 궁중 무용이 펼쳐지는 듯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매우 정제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야금의 여백과 울림, 세밀한 음향 처리로 한국적 미감을 극대화하며 청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황병기는 이 작품을 통해 정적인 아름다움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어나는 소리의 결을 정교하게 직조하였으며, 이는 가야금 독주곡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침향무’는 국내외에서 널리 연주되며 한국 현대 국악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황병기의 1975년 작품 ‘미궁(迷宮)’은 전통 가야금 음악에서 보기 어려운 실험성과 추상성을 담은 곡이다. 이 작품은 단선율 중심의 전통 국악과 달리 다층적 구조, 불규칙한 리듬, 음색 중심의 표현을 통해 현대 음악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청자에게는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긴장과 불안, 미묘한 감정을 전달하며, 국악이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닌 살아 있는 예술로서 끊임없이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궁’은 일부 보수적인 국악계로부터는 낯선 시도로 받아들여졌지만, 예술적 도전정신과 음악적 깊이를 인정받아 오늘날에는 한국 창작국악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황병기는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이기도 했다. 197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들은 현재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국악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백남준, 윤이상, 존 케이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과도 교류하며 국악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2018년 별세 이후, 그의 음악은 여전히 다양한 무대에서 연주되고 있으며, 유작들은 가야금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황병기의 예술은 단순히 음악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전통음악을 오늘에 맞게 해석하고 미래로 연결하려는 집념의 산물로 기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