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역사

거문고의 유래와 전승

가야금 연주자 2025. 6. 3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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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태동한 신비로운 현악기, 거문고
거문고는 한국 전통 음악을 대표하는 현악기로, 그 기원은 고구려의 음악가 왕산악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산악은 중국 진(晉)나라의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백여 곡의 음악을 작곡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연주에 감동한 검은 학이 춤을 추었다는 전설은 거문고의 신비성과 예술적 가치를 상징하며, 이를 반영해 '현학금(玄鶴琴)'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검다’를 의미하는 ‘현(玄)’과 현악기를 뜻하는 ‘고(琴)’가 결합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거문고’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설 외에도 최근에는 보다 복합적인 기원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등장하는 악기 이미지로, 이는 왕산악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거문고와 유사한 현악기가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이 그림 속 악기는 칠현금과는 구조적으로 다르고, 오히려 현재의 거문고에 더 가까운 형태를 보입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왕산악이 거문고를 새로 발명했다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던 고구려 고유의 현악기를 정비하고 음악 체계를 마련한 인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거문고가 단순히 중국 악기의 영향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우며, 고구려 고유 음악 전통과 외래 문화가 융합된 독창적인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복합적 기원은 거문고가 단순한 악기를 넘어 한국 음악사의 상징적인 문화유산임을 더욱 부각시켜 줍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거문고 전승과 음악적 발전
삼국 통일 이후 거문고는 신라 음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신령한 악기’로 여겨져 일부 계층만이 연주할 수 있었으며, 일반 대중은 쉽게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8세기 말엽부터는 본격적인 전승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우조와 평조 두 가지 악조를 기반으로 약 187곡의 연주곡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거문고는 궁중 음악뿐 아니라 불교 선가의 정신을 담은 고급 음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거문고의 대표 연주자로 알려진 옥보고는 곡의 제목을 한시풍으로 지었으며, 그의 음악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철학적 사유와 정신적 수양을 담은 예술로 평가되었습니다. 『삼국사기』가 편찬되던 고려 초에는 대부분의 곡이 사라졌지만, 옥보고의 작품은 그 정신과 상징성을 통해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거문고 문화와 계승
고려시대에 거문고는 향악기로서 궁중 연주에 편성되어 사용되었고, 선비들의 풍류와 교양 음악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궁중의 제례나 향악 합주에서는 가야금, 해금 등과 함께 사용되며 음악의 깊이와 품격을 더해주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거문고는 단순한 연주 악기를 넘어 교양인의 상징으로 자리잡습니다. 유학자들은 거문고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자연과 교감하며, 문학적 정서를 표현했습니다. 특히 시문과 거문고를 함께 즐기는 것이 조선 선비문화의 전통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러한 문화는 오늘날까지 한국 전통 예술의 본질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조선 궁중에서도 거문고는 꾸준히 연주되었으며, 전통 음악의 핵심 악기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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