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역사

세종대왕과 박연의 국악 이야기

by 가야금 연주자 2025. 6. 24.
반응형

매년 영동에서 열리는 난계국악축제의 '난계'가 박연의 호였다니! 세종대왕과 난계 박연의 국악 사랑을 알아보겠습니다.
 
세종대왕은 음악을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화합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어진 정치를 펼치기로 유명한 세종은 즉위 후 음악을 비롯한 문화 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한글 창제 및 과학 기술의 진흥과 함께 국악의 부흥 역시 세종이 꼽은 중요한 과업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궁중 음악은 우리 고유의 향악과 중국에서 전해진 당악·아악 등이 뒤섞여 있어 체계가 없고 격식에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지요. 세종은 이러한 국악 전반을 정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교의 예악(禮樂) 사상에 입각한 세종대왕은 예법과 음악을 함께 바로잡아, 음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일부 신하들은 나라의 큰 행사에는 중국 음악인 아악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세종은 "우리 음악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결코 중국에 뒤지지 않는다"며 자부심을 가지고 국악을 진흥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물색했고, 마침내 발탁된 사람이 바로 당대의 음악가 박연이었습니다. 또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악공(樂工)들을 모아 악기의 구조부터 음악 이론까지 폭넓게 연구하도록 하고, 직접 이 국악 혁신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습니다.
 
박연은 충청도 영동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피리 등 여러 악기 연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는 열여덟 살에 아버지를, 스물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지만 슬픔을 음악으로 달래며 더욱 깊이 몰두했다고 전해집니다. 한양에 과거 시험을 보러 올라왔다가 길거리에서 피리를 부는 악사를 만나 자신의 연주를 교정받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배움에 적극적이었지요. 결국 학문에도 두각을 나타낸 박연은 3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해 집현전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관료로서도 입신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 세종과 인연을 맺었는데, 음악에 관심이 많던 세종은 박연의 실력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세종은 세자 시절 박연에게 “훗날 내가 임금이 되면 조선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일을 함께해 주시오”라고 당부했고, 박연도 그 뜻에 감명하여 기꺼이 따르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원래 조선 시대에는 음악적 재능만으로 관료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지만, 세종의 남다른 안목과 후원 덕분에 박연은 예외적으로 음악을 통해 나라에 기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실제로 세종이 즉위한 뒤 박연은 궁중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의 중요한 직책에 발탁되어 본격적으로 국악 발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박연은 곧 궁중 음악의 체계를 바로잡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국가 의식과 연향(연회)에 쓰이는 음악을 격식에 맞게 정비하고자, 오랫동안 흩어져 전해지던 곡들과 악보를 하나로 모아 체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정 음악에는 세 갈래 전통이 공존했는데, 제례에 쓰이는 주나라 시대의 유교 의식 음악인 아악과, 궁중 잔치에 쓰이는 중국 당나라의 음악(당악), 그리고 우리 고유의 민속 음악인 향악이 한데 혼재되어 혼란이 있었지요. 박연은 세종의 뜻에 따라 우선 아악을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은 옛 기록을 참고해 복원했으며, 동시에 향악과 당악의 장단과 선율까지 깊이 연구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음악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정리된 여러 곡들을 악보로 편찬하고, 직접 또는 장인들과 함께 악기를 제작·개량하여 음을 표준에 맞게 조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백 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대규모 합주에서도 맑은 화음을 낼 수 있는 토대가 갖추어졌습니다. 박연은 잠시도 연구를 쉬지 않고 깨어 있는 시간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박자를 헤아리며 곡조를 흥얼거릴 정도로 열정을 쏟았고, 그 결과 십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조선 국악의 기틀을 탄탄히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새 궁중 음악은 세종 15년(1433년) 새해에 열린 궁중 잔치에서 성대하게 연주되어 세종이 꿈꾸던 예악 정치의 이상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박연이 국악 발전에서 이룩한 큰 성과 중 하나는 정확한 표준 음높이, 즉 기준음의 확립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악기의 음을 바로잡기 위해 중국의 전통 이론을 참고해 대나무 관으로 황종율관(기준음관)을 만들었지만, 재료의 차이로 처음에는 원하는 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정확한 황종율관을 완성하여 기준음을 찾아냈지요. 이 기준음을 바탕으로 나머지 열한 개의 율관도 제작되었고, 이를 통해 모든 궁중 악기의 음정을 통일하여 조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박연은 궁중 음악에 필수적인 악기인 편경(編磬)을 우리 재료로 새로 제작하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편경은 여러 개의 돌편을 매달아 소리를 내는 타악기로 음의 높낮이가 변하지 않아 다른 악기의 음을 맞추는 기준이 되는 중요한 악기입니다. 원래 고려 시대에 들어온 중국산 옥돌 편경을 써 왔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돌이 깨어지고 음이 틀어져 버려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지요. 세종의 명을 받은 박연은 전국 각지의 돌을 시험해보다가 경기도 남양에서 마침 적합한 옥돌을 찾아 새 편경을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편경은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지만, 연주를 들은 세종이 한 음이 약간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박연은 돌편을 다시 갈아 미세한 음정까지 바로잡았고, 결국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한 음을 내는 편경을 완성해 임금께 바쳤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새 편경은 이후 모든 악기의 음을 맞추는 기준 악기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튼튼한 기반 위에서 세종과 박연은 조선의 새로운 음악 문화를 한층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박연이 다듬어 놓은 국악의 기초를 바탕으로 직접 악곡을 만들고 악보를 창안하는 등 창조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동양 최초의 유량(有量) 악보인 정간보가 이 시기에 세종에 의해 만들어져, 음악의 높낮이와 길이를 체계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종은 또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을 담은 <여민락>과 같은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여 음악으로 백성과 소통하고자 했습니다. 세종과 박연이 정비한 궁중 음악과 악기 체계는 후대의 임금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특히 세종이 기틀을 세운 아악은 세조 때 <보태평>과 <정대업> 등의 작품으로 완성되며 종묘제례악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렇게 마련된 조선의 궁중음악 전통은 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가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종의 원대한 비전과 박연의 열정 어린 노력이 만나 이루어진 국악의 도약은 후세에 길이 남을 소중한 문화 유산이 되었습니다. 박연은 훗날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받았고, 그의 고향 영동에서는 지금도 '난계 음악제'를 열어 그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세종과 박연이 함께 이룬 국악 발전의 결실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반응형